VOL. 72
EISSN 2384-2776 2024 WINTER
대한대장항문학회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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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음악, 들리는 그림

남양주 양병원
대장항문외과 고용택

 

“분수처럼 흩어진 푸른 종소리.”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김광균 시인이 지은 “외인촌”의 마지막 시구(詩句)이다. 이는 청각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전이시키는 이른바 ‘공감각적 심상’의 대표적인 예로 자주 언급된다. 서로 다를 것 같은 감각을 시의 언어로 표현하였을 때 두 영역 간의 접점이 상호 화학 작용을 일으키면서 더더욱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온다. 종소리를 들을 때 알알이 흩어지며 사방으로 쏟아지는 분수를 상상하다니 얼마나 짜릿한 순간인가.

 

이처럼 예술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감각들이 조합되어 예기치 못한 감동을 주는 일들이 적지 않은데, 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음악적 요소가 다른 영역의 작품들과 만나 참신한 감각으로 재창조되거나 음악 작품을 듣고 있는 동시에 시각적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는 경우도 많고, 혹은 다른 예술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작곡되는 음악도 있다. 이를 두고 “음악이 보인다.” 혹은 “그림이 들린다.”라는 표현을 쓰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최근 예술의 전당에서 “색채의 선율”이라는 부제로 화가 “뒤피”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담하면서도 발랄한 뒤피의 붓 터치 뒤로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의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와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혹시 화가가 이 음악을 들으면서 그린 그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림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싸고 있는 배경 음악이 이렇게 “들리는 그림”이 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전시회에서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들이 전시회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또 다른 공감각적 작품으로까지 느껴지게도 할 만큼 그 무게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러니 아마도 그림과 어울리면서도 감동을 증폭시킬 수 있는 음악을 선곡하는 일 또한 전시회의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음악을 듣다 보면 악기 소리에서 멈추지 않고 어떠한 이미지가 그려지듯 표현되는 곡들이 있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에서는 “물”이라는 소재를 연주하여 소리를 뛰어넘은 새로운 느낌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에서는 어두컴컴한 날, 떠나간 여인을 기다리는 중에 창가에 떨어지는 잔잔하면서도 무거운 비의 이미지를 그려내며,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에서는 블타바강의 유유하고 장엄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물결의 모습임을 음으로 구현하여 그의 조국애를 표현하였다.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을 들으면 은근히 일렁이다가도 뱃전을 삼킬 듯이 세차게 몰아지는 파도와 시커먼 입을 벌린 동굴과 같은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한편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듣고 있으면 북유럽의 빙하가 떠다니는 바다가 그려지고 곡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강건함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보이는 음악”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음악가가 미술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작곡한 작품들도 있다. 그중 라흐마니노프가 1905년 작곡한 교향시 “죽음의 섬”은 아놀드 뵈클린의 작품 (그림 1)을 그 배경으로 한다. 사이프러스 나무숲 안쪽의 짐작할 수 없는 짙은 어둠으로 다가가는 배와 그 배를 젓는 노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는 선율로 시작하는 이 곡은 몇 년 전 가입했던 클래식 동호회 사이트에 처음으로 포스팅 한 곡이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모리스 라벨의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왕녀 마가레타의 초상”(그림 2) 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하였다고 한다. 평소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라벨은 “어린 공주가 파반느를 추는 장면을 상상하며 작곡했다.”라고 말했다. 22세에 요절한 슬픈 사연의 공주가 느리게 추는 춤을 연상하게 하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선율은 노스텔지어적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클래식 음악사에서는 작곡가와 다른 영역의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쇼팽이 숨을 거둘 때까지 곁을 지켰던 친구이자 낭만주의 화풍의 거장인 들라크루아는, 쇼팽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불안해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천재 예술가로의 면모와 심리 등을 후대에 남겼다. 그 밖에도 음악과 서로 다른 영역이 만나 새로운 콘텐츠가 창출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명화와 어울리는 클래식”은 미술과 음악 간의 조화를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이미 고유한 영역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3년 군 복무를 할 때였던가, 나는 뭔가 나 자신에게 자극을 주고 싶어져서 그때까지는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귀를 닫고 지내왔던 영역에 과감한 투자-베토벤의 교향곡과 피아노 소나타 CD 전집을 구매-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취미의 시작이었다. 그 후 몇 차례의 좌절과 시행착오의 시간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변 지인들에게 클래식 전도사로서 입문을 안내하기도 하고 선곡도 해주는 등 클래식 음악 듣기는 취미의 한 자락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좋아하는 작곡가가 하나둘 생기고 이른바 최애(最愛) 작곡가가 바뀌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인상주의 작곡가의 곡들을 많이 듣게 된다. 아마도 인상주의 화풍을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이 작용하는 것 같다. 인상주의 음악에서는 곡의 형식이나 방향보다는 화성이나 음색을 통해 분위기나 감각적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요즘은 주로 운전 중에 음악 감상을 한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나의 플레이리스트 중에서 신중하게 곡을 골라 블루투스 스피커 스위치를 켜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차 안이라는 나만의 공간에서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이사를 하게 되면 내 방에 음향 시스템을 마음껏 설치하고 음악을 감상하리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나는 오늘도 러닝타임 40분의 교향곡을 선곡하는 즐거움에 빠져 본다.

 

 

 

 

(그림 1) 죽음의 섬 – 아놀드 뵈클린 (1880)

 

 

 

(그림 2) 왕녀 마가레타의 초상 – 벨라스케스 (1889)

 

 

 

회차 분류명 제목 등록일자
71 회원기고문 보이는 음악, 들리는 그림 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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