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82
EISSN 2384-2776 2026 SUMMER
대한대장항문학회 소식지
가온누리란? 세상(누리)의 중심(가온데)이란 뜻의 순수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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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전하는 말

 

남양주 양병원
진료부장 고용택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각각의 표현 방식이나 기교는 다를지라도 그 안에 그린 사람의 의도가 은근히 드러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에서부터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명화에 이르기까지, 화가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그가 후대에 전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떠올려보는 것이 미술 작품 감상이 주는 재미 중의 하나이다.

서양 미술사에 ‘알레고리’라는 흥미를 자아내는 용어가 하나 있다. ‘알레고리’라 함은 추상적 개념을 이미지로 가시화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라는 뜻으로, 이는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작품 속에서 구현되는데, ‘알레고리’를 떠나서는 서양 미술의 표현법을 논하기 힘들다고 한다. 다양한 상징과 은유가 그림 속에 마치 퍼즐처럼 교묘히 스며들어 있어서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나타내 주기도 하고, 화가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들을 파악하는 것이 작품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나 역시 처음 서양 미술사를 접하게 되었을 때, 작품 속 ‘알레고리’에 이끌렸고, 당시에는 화가가 나에게, 그림이 보여주는 세계에 참여하라며 손짓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에는 미술관을 가끔 찾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마저도 소원해진 상태이고 스마트폰에서 제공해 주는 그림들을 보고 넘기는 정도가 전부이기에, 내 취미가 ‘그림 감상’이라고 내세우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까운 미래에 다시 이전의 열정을 불사르리라 내심 다짐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림에 대한 나의 관심의 끈을 이어가게 해 주는 과거의 결정적 순간은 2012년 유럽 여행이었다. 서유럽에 5주 동안 체류할 기회가 있었는데 첫 번째 일정으로 방문하였던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접한 한 화가의 자화상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669년 죽기 전에 그린 마지막 자화상. 슬픔, 체념, 회한, 성찰,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킨 듯한 눈물 맺힌 눈동자. 바로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었다. (그림 1)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인간의 마음속을 꿰뚫어 본 결정체”라고 하였다. 그에게 자화상은 곧 자서전이었다. 인기 있는 초상 화가로서 명성과 부를 누리던 젊은 시절부터 가난에 시달리던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애의 단면들을 자화상으로 남겼다.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것 없이 생생하고 지극히 현실적. 전매특허인 빛과 어둠의 극적 대비를 활용해 그 효과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자화상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응시했던 수십 분의 시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탁월함과 빼어남을 넘어선 세월과 함께 완성된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의 인생에서 내가 그려왔던 자화상들은 여기 마지막 자화상을 향한 것이었다. 나의 삶을 보고 느껴라. 그것이 그림이든 인생이든.” 나는 그의 메시지가 귓가에 울리는 경험을 하였고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여 바로 서양 미술사에 입문을 하게 되었다.

그림에 관심을 갖은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나무를 과거 화가들이 똑같이 보고 그림에 담았음을 떠올려 볼 때 그냥 보고 지나치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올 때가 있다. 주변이나 영상 매체를 통한 생활 곳곳에 그림 속에 나타난 표현들과 색채들의 패턴을 차용한 흔적들이 있음을 발견하곤 혼자 흐뭇해하던 순간들도 기억이 난다.

그림을 보면서 예기치 못한 감정의 커다란 울림을 2015 한가람 미술관 마크 로스코 전에서 또 한 번 경험하였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무심결에 찾은 미술관에서는 병원에서 한두 번 봤음직 한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는 상태였고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좋아하는 인기 있는 화가의 전시회임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화면을 넓게 구획한 두서너 개의 면들과 단순한 색채는 추상 회화에 대한 접근과 감상법에 익숙지 않은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그림 2) 하지만 이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색과 색이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있었고 그 당시에 대한 아련한 향수, 잡지 못하는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잊혔다고 생각했던 후회, 상념들이 떠오르며 그림 앞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림과 45cm 앞에 서 있는 나, 그리고 그 사이 공간이 하나 됨을 느꼈고 작품 속 색, 면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복받치는 감정의 폭발을 체험하였고 뒤이은 위로와 자유의 시간이 찾아옴을 느꼈다. 작가의 감정을 공감하고 있는 나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를 회고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난해하다고 생각하였었던 현대 미술 추상 회화를 가슴으로 느껴본 경험이었다.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작품에 어떠한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내 작품 앞에서의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자신의 작품 감상에 있어서 작가가 남긴 말이다. 미술 작품이 관객에게 전해 주는 다양한 감동의 세계를 경험해 보았고 한동안 이를 지속해 보고자 같은 크기의 포스터를 벽에 붙여서 바라보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그림값을 감안하면 포스터도 감지덕지였다.
 

 



어느덧 중년의 한가운데를 넘어선 적지 않은 나이임을 하루하루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좋은 취미를 갖는 것’이 중년의 시간을 슬기롭게 보내는 요소임을 절감하지만 끈기도 적극성도 부족하여 좀처럼 취미란에 리스트를 추가하기가 어렵다. 이미 사라져 버리고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호기심들을 다시 살려내고 사그라진 열정을 되살려 그동안 생각에만 그쳤던 관심을 두었던 분야, 배우고 싶은 것들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나의 삶을 좀 더 알차고 풍요로운 시간들로 채워나가고 싶다.

회차 분류명 제목 등록일자
64 회원기고문 그림이 전하는 말 202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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