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82
EISSN 2384-2776 2026 SUMMER
대한대장항문학회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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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마주한 거장들의 대화

남양주양병원
고용택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명작들을 책과 도판으로 접하며, 나는 ‘화가들의 화가’로 불리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 (그림 1)을 직접 대면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이것이 스페인 여행을 계획할 때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방문을 최우선 순위로 둔 이유였다.

 

오직 이 작품만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공간인 12번 방에서, 공간과 시간, 관찰자의 존재를 뒤흔드는 마법 같은 대작 작품(318 X 276cm) 앞에 서는 상상을 하곤 했다. 단순히 그림을 보는 관람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공간의 일부가 되는 경이로운 체험을 꿈꾼 것이다. 지면으로 볼 때도 화면 속 인물들이 나를 응시하는 듯한 기묘한 몰입감을 느꼈는데, 실물을 마주했을 때 뿜어져 나올 그 서늘하고 우아한 긴장감을 기대해 본 것이다.

 

그러나 설날 연휴를 이용한 스페인 여행이 일정상 바르셀로나 한 도시 방문으로 결정되면서, 프라도 미술관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뜻밖에도 바르셀로나의 몇몇 미술관들을 둘러보며 벨라스케스, 특히 (시녀들)에 대한 후대 화가들의 오마주의 흔적을 따라가 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예술의 역사에서 오마주(Hommage)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선배 화가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화풍이나 구도를 자신의 방식을 재해석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화가들이 서로에게 바치는 찬사를 지켜보는 것은 마치 수백 년의 시간을 교차하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엿듣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준다. 이는 단순히 기교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선 거장의 영혼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원작의 요소를 가져오되 자신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철학을 덧입혀 캔버스 위에서 시각적인 대화를 나눈다.

 

피카소 미술관에서는 오마주의 가장 유명한 사례를 목격했다 (사전 공부 없이 방문하였기에 더욱 신선한 경험이었다.). 원근법과 시선의 처리가 완벽한 고전의 정수 (시녀들)을 무려 58번 재해석한 피카소의 집요함에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그림 2) 그는 형태를 해체하고 입체주의적으로 변형하며 선배 화가가 가졌던 공간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냈다. 입체주의 거장답게 인물들을 여러 각도에서 본 모습으로 쪼개어 배치하고 3차적인 공간을 2차원의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했다. 

특히 화가의 존재감이 크게 두드러지게 묘사된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이는 벨라스케스의 예술적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림을 창조하는 ‘화가’라는 존재의 절대적인 힘을 강조하려 했던 의도로 읽힌다. 피카소에게 이 오마주는 수세기 전의 거장에게 “당신의 시선은 여전히 유효하며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라고 외치는 예술적 경의이자, 신성한 예술적 영토를 확장하려는 도전이었다.

 

또다른 바르셀로나의 대표적 예술가, 달리의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는 피게레스 달리 미술관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달리의 상징과도 같은 치켜 올라간 콧수염조차 사실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자신과 거장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는 벨라스케스를 정신적 지주이자 “회화의 신”으로 숭배하며 평생에 걸쳐 (시녀들)을 변주했다. 작품 속 화가의 위치에 자기 자신을 그려 넣으며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위에 실제 공기를 그려 넣은 유일한 화가다” 라고 칭송하면서도, “내가 현대의 벨라스케스다” 라는 예술적 야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그곳에는 달리가 피카소에게 헌정하며 그린 상징적인 요소로 가득 찬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림 3) 달리는 피카소를 그릴 때 자신의 전매특허인 “흘러내리는 듯한 기법”을 사용했다. 원작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뚜렷하게 새겨 넣는 그 팽팽한 긴장감이 오마주의 핵심 재미다. 달리에게 피카소는 넘어서고 싶은 벽이자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해준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의 오마주는 단순한 흉내를 넘어 거장을 자신만의 초현실주의적 언어로 재해석하여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스페인 화가들의 계보를 잇는 오마주를 보며, 선배 거장의 어깨 위에서 시대의 문법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에너지를 느꼈다. “예술은 죽지 않고 형태를 바꿀 뿐이다”는 말처럼 스페인 거장들의 오마주는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릴레이 같았다. 

 

가우디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또한 그곳 미술관을 거닐며 가졌던 과거로의 여행으로부터 얻었던 즐거운 시간들은 나를 절로 미소짓게 한다.

 


그림1


그림2


그림3



회차 분류명 제목 등록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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